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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한산도대첩 그리고 침략 사망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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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수많은 왜장들 중에 조선침략에 가담한 선봉장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라고 하지만 분로쿠의 역 또는 경장 의역으로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칭하기도 하는데요

당시 연호를 붙여 부를는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도공들을 납치해 갔는지 도자기 전쟁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하고요

와키자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칠 본 창으로 불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위 성격의 직속 장군 중 하나였습니다 

시즈카 타게의 칠 본 창은(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히라노 나가야스, 카타키리 카프 모토,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스야타케노리)인데

이 칠 본 창이 두각을 나타낸 사건이 있는데요

바로 시즈카 타케 전투입니다

바로 시바타 마쓰이와 히데요시의 충돌인데요

시바타 마쓰이는 오다가 문의 맹장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측근의 배신으로 절에서 화재로 사망 후 권력을 두고 다투는 기요스 회의에서 결국 히데요시와 등을 지는 자입니다

전하는바에는 꽤나 맹장으로 히데요시의 최대 난적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친위 시동인 이 칠 본 창의 활약으로 난적(시즈카 타케 전투)을 이겨냈습니다

칠 본 창은 그런 공이 있어 히데요시 겐 각별한 의미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탁월한 시류를 집어내는 감각과 뛰어난 전투능력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다에게 고스란히 물려봤은 전국 통일의 권력은 겉으로는 잠잠해 보이지만 아직 내부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각지의 분국들의 불씨 그 타오르는 에너지를 반감시키거나 정치적으로 잠재워야 하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히데요시의 선택은 좁은 일본 본토가 아닌 외부세계로의 팽창이었습니다

그 교두보는 조선땅이 되었던 것이고요

 

 각 분국 영주들의 참전을 전제로 하였지만 우선은 주된 선봉은 역시 친위세력인 카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왜장들이었습니다

친위 왜장들은 앞다투어 공을 새우려 조선땅에 침공했는데요

당연히 공을 세워 땅과 지휘를 하사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칠 본 창에 이름을 올렸다 하더라도 아직 공이 부족한 자들은 조선 침공은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한 최고의 기회였습니다

그런 자들 중에 이 와키자카도 끼어 있던 것이고요

그런 포부 넘치던 왜장 와키자카

다른 칠본창과는 다르게 비교적 미약한 세력의 (칠 본 창 리더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대놓고 그를 하대함) 그였기에 상대적으로 미약하고 억눌려있던 세력 욕과 야심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본 내에서 해적영지를 하사 받은 그였기에 자연스럽게 수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육군을 따라 와키자카와 왜군들은 조선땅을 헤집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왜군에게 빼앗긴 도성을 회복코자 집결 중이던 충청, 경상, 전라 연합군 7,8만의 군세와 맞닥뜨리는데 여기서 크게 사건이 터집니다 

소수의 병력 1000명으로 급습을 감행 10배 가까이 되는 아직 전열이 정비되지 않은 조선대 병력을 패퇴시키는 전과를 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인 성전투이며 와키자카 생애의 아마 가장 큰 전공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오타니 요시츠쿠를 패퇴시키는 전공 또한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이 전투 패배의 영향으로 조선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까지 거론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사실 일본 내에서 그는 네임드 장수에 들지 못하는 일반 장수로 알려져 있는데요

아마도 분로쿠의 역은 일본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패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용인 전투 대승으로 인해 태합(히데요시)의 인정을 듬뿍 받으며 이 전쟁에서 와키자카는 인지도를 높이게 되지요 

시간은 흐르고 북진한 왜군은 당연히 보급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육로는 시간제약과  의병들 항쟁 등 장애물이 많아 사실상 막히게 되고 해상으로 보급과 병역을 이동시켜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일본군에게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 터지는데요

이는 전혀 조선 침공에 계산되어 있지 않던 해상로의 폐퇴와 봉쇄입니다

보급이 안 되면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활약 덕분입니다

 

왜군 수군은 그야말로 남해와 서해바다에 완전히 조선수군과 만나는 족족 완전히 박살이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바다에서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거의 전폐에 가까운 왜군 

 

 

여러 왜장이 수군이 이끌고 북진을 시도했지만 박살이 나기는 매일반이었습니다

그런 왜장 중에 이 와키자카도 있었던 것이고 이 와키자카는 희대의 해상 회전 한산도대첩의 왜군 지휘관(1진 와키자카 2진 구키 요 시카타 3진 가토 요시아키)이었습니다

 한산도대첩의 전황은 당시 육전은 왜군들의 압승인 상황으로 수로를 통해 대규모 선단이 북진하는 상황 그 야말로 그대로 진행된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수세에 몰려 나라가 왜군에게 절단 나기 일보직전이었다는 말입니다

육지에서 나름 활개를 치다가 수군으로 본래 임무로 돌아온 와키자카는 득의양양하여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세의 장수였으며 저력 있는 장수임에는 틀림없을 터입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중요한 임무를 다른 장수들을 놓아두고 그에게 맡겼던 것이죠

보급과 해상로 확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견내량 해전이라고도 불리는 한산도대첩은 왜군과 조선수군의 숙명을 건 사실상의 썅방의 총력전이었습니다

그런 전투를 비리비리한 일반형 장수에게 맡겼을까요

 

 

건곤일척의 승부

히데요시와 와키자카와의 최근 서신을 현재에 와서 해독한 결과 히데요시가 그에게 얼마나 심대한 관심과 깐깐한 신임을 주었는지 밝혀지게 되었는데요

과연 그가 일본에서 인식하고 있는 별 볼 일 없는 득보잡 장수였을까요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입니다

 그 증거는 와키자카와 히데요시의 수많은 서신들이 증거로 밝혀주고 있는데요

히데요시 사망 이후 도쿠가와 정권에서도 살아남아 후세를 온전히 전한 정세에도 밝은 영리하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습니다(다른 칠본창들은 말로가 비참함)

 그런 그가 바다에서 조선수군을 만나 견내량 앞바다에서 완전히 박살이 나고 다른 왜장들 또한 있다지만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론으로 가자면 와카 자카의 패배는 당시 가장 신임받고 능력 떨치던 선봉장의 패배입니다

전쟁의 터닝포인트 즉 일종의 선고였습니다 

 조선침략 사망선고 말이죠  

이후 이어진 연속된 패배는 사망선고 결과를 더 확실히 증명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가도 정명을 외치던 왜국 본토의 히데요시는 패전 소식을 전해 듣고 이미 그 시점부터 심각한 정신적 쇼크가 왔다고 보는 것이 정황상 맞겠습니다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뒤 최후를 맞이하고요

 그 영특한 히데요시가 이 전쟁의 결과를 예측 못했을까요

아마도 맨 정신으로는 극복하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이 해전의 파급효과는 모든 전쟁의 양상과 판도를 뒤집어놓았고 조선군의 압도적인 승리와 일본군에겐 정신적으로 사망선고와 같은 완패였던 것입니다 

  

 야심과 침략 욕으로 가득했던 뛰어나고 출중했던 이 왜장은 결국 개인적으로는 불행히도 급이 너무나도 달랐던 그분을 만났고

완전히 버릇이 고쳐져서 본토로 속절없이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수많은 왜군들의 시체와 헤어릴 수 없는 무수한 피해를 남긴 채 말입니다